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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변을 중심으로 구석기부터 신석기까지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집중적으로 밀집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강을 따라 교통이 열리고 인류가 살기 좋은 제반 조건을 갖추고 취락이 발달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며, 이것이 또한 중원문화의 중심지로서 충주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삼한중 마한의 일부였으나 백제가 성장하여 근초고왕 5년 (350년경) 백제의 영역으로 낭자곡성(娘子谷成)으로 불리다가 그 후 5세기 중엽에 고구려가 남하하여 오게 되자 백제는 한강변에서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후퇴하게 되었으며 고구려는 중원지방을 석권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해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 세력을 한강유역에서 물리치게 되었다.
이 작전 중에 신라는 단양지역을 확보하고 단양적성비를 세워 새 영토의 주민들을 회유하였습니다. 신라는 이어서 백제가 수복한 한강 상류지역까지 빼앗아 전 한강유역을 확보하였습니다. 따라서 중원지역은 자연 신라의 장악 하에 들어 신라 진흥왕은 557년 국원에 소경을 설치하고 다음해에 중앙 즉 경주의 다음가는 부도(副都)로 삼았다. 또한 통일 후 새로 편입된 백제, 고구려의 진호를 목적으로 불사를 일으키며 중앙탑을 세웠습니다.
이상과 같이 중원지역은 삼국이 번갈아 차지함으로써 삼국의 문화가 재융합 되는 특성을 지니게 되어 독특한 중원문화로 나타나게 되었다. 문화유산으로는 중앙탑, 고구려비, 건흥 5년명 금동불, 누암리 고분 등이 있습니다.
고령의 건국 주체세력은 신라의 지배력 약화를 틈타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호족들이었습니다. 충주지역의 대표적인 호족은 충주유(劉)씨로 유긍달의 딸이 태조 왕건의 세 번째 부인이 되는 등 충주의 위상은 고려시대에도 중부지역의 중심도시로 지속되었습니다. 왕건은 나라를 건국한 후 전국의 주렉管군현의 제도를 도입하는데, 이때 중원을 충주로 바꾸어 오늘날까지 이 지명이 이어오고 있습니다. 13세기에는 몽고군의 침입으로 의주와 개경이 함락되는데, 고려는 일단 몽고와 강화를 맺고 돌려 보냈습니다.
이때 일부의 별동부대가 광주련姸囹청주 등 여러성을 공격하였는데 오직 충주만은 충주성을 지키는 노군잡류별초에 의해 끝까지 항진하여 몽고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또한 5차 침입(1252)때는 처인성(용인)에서 살리타이를 사살한 김윤후가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재직하면서 몽고군과 70여일 동안 혈전을 벌여 몽고군을 격퇴시키게 되었습니다. 고종 42년(1255)에는 몽고병이 남쪽을 석권하고 다시 하늘재를 넘어 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충주의 다인철소(지금의 이류면)의 사람들이 몽고군을 물리쳤다. 이러한 사실은 중원인들이 외세로부터 내고장을 지키겠다는 뚜렷한 의식의 발로로 얻어진 결과라 할 것입니다.
한편 충주지역은 남한강이 관통하고 있어 강을 이용한 조운이 성하던 곳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 13조창 가운데 이 지역에는 덕흥창(德興倉)이 있어 경상도 지역과 충청도 지역에서 거두어 들인 세금을 조운을 통하여 운반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일제시대까지 계속 되었다. 이시대의 문화는 불교 문화를 바탕으로 한 미륵리 대석굴사원, 문숭리의 숭선사지·법경대사자등탑비 송계의 사자빈신사지석탑, 월광사 원랑선사탑비 등이 남아 있습니다.
행정구역을 변경하여 충청도라 개칭하고 좌감사를 배치하였으며 세조 3년(1457) 충주진영이라 개칭하고 전국 을 7도로 분할하여 충주영장으로 하여금 단양, 영춘, 제천, 청풍, 음성, 천안 등 8군의 군정사무를 관장하도록 하였으나, 선조 25년 임진왜란을 당하자 신립장군은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8천 군졸을 거느리고 왜적과 대적하였으나 애석하게 패전하고 이후 내우외환을 간접적으로 받으면서 충원현 또는 충주목으로 불리어 오다가 고종 33년 행정을 개편하고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충주목사를 폐하고 충주는 도청 소재지로 된지 14년만에 교통불편을 이유로 순종 2년 도청을 청주로 이전하고 충주는 군청소재지로 군수를 배치하였습니다.
한일합방 이후 1913년 군면 페합으로 충주는 충주군 읍내면에 속하다가 1917년 충주면으로 개칭하고 1931년 5월에 지방제도의 개정에 의하여 충주읍으로 승격한 후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일제 침략기에 우리지역의 항일 운동의 시작은 3월 11일 달천리 천주교인이 독립선언서 낭독에서였습니다.
이후 4월 1일 이희갑이 중심이 된 용원장터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며 1920년대에 들어 광주학생항일운동의 확산으로 대소원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해 또 한번의 만세운동이 전개 되었습니다.
해방된지 12년만인 1956년 7월 8일 충주읍은 충주시로 승격되고 나머지 지역은 중원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변경조치에 의하여 괴산군 상모면이 중원군으로 1973년 7월 1일 이류면 하문리는 괴산군으로 신니면 광월리의 일부는 음성군으로 1987년 1월 1일 제천군 한수면의 사기리·명오리·서운리·포탄리·함암리·호운리는?충주시 동량면으로 1989년 1월 1일 산척면 원월리가 제천군으로 편입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에는 도농통합에 의하여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 충주시로 발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